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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고려 후기에 안동권씨 추밀공파가 부각되어 득세하기까지의 배경을 간략히 말씀드렸는데, 그와 관련해서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에 안동 권씨가 오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학계에서도 논의가 조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충선왕은 1308년 11월에 왕실 내에서의 근친혼을 금지하면서 (아마 몽골의 영향인듯?) 왕실의 구성원들과 혼인이 가능한 15개 귀족가문을 직접 지정하는데, 이 15개 가문이 바로 누대공신재상지종입니다. 이 15개 가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주김씨 김휘의 집안, 언양김씨, 정안임씨, 경원이씨, 안산김씨, 철원최씨, 해주최씨, 공암허씨, 평강채씨, 청주이씨, 당성홍씨, 황려민씨, 횡천조씨, 파평윤씨, 평양조씨. 이 15개 가문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권문세족으로 종종 언급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안동권씨가 빠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유력한 가문을 모두 포함한 목록이 아니거든요. 정안임씨의 경우는 고려 초중기에 빛이 좀 났지만 무신정권과 몽골 간섭기를 거치면서는 존재감이 많이 약해진 편이고, 철원최씨도 존재감이 많이 약해졌다가 공민왕 대에 최영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다시 빛이 납니다. 다시 말해서 이 15개 가문은 고려 후기의 실질적인 핵심 지배계층은 아니었으리라는 것이죠. 위 목록은 고려 초기의 유력한 가문과 고려 후기 당시의 유력한 가문을 적절히 섞어서 작성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사실 충선왕의 명령(왕실의 구성원들은 15개 귀족가문하고 혼인할 것)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도 의문이지요. 앞선 포스팅에서 권부의 아들 6명과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졌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사위 2명이 바로 왕족이거든요. (나머지 1명이 바로 이제현) -o-;;;;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하자면, 충선왕이 자기 명령의 시행여부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도 의문거리예요. 충선왕의 권위주의와 변덕은 꽤 심각한 수준이었거든요. 어쩌면 누대공신재상지종은 충선왕의 변덕의 소산이며, 그 변덕의 소산이 기록으로 남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후세 학자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번 포스팅은 참 무의미한듯. -_-;;;;;;;;;;;;;;;;;;;;;;;;;
권단의 아들 권영은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뒤 비교적 순탄한 벼슬살이를 계속했습니다. 충렬왕이 퇴위하자 충선왕이 즉위하여 광정원, 사림원 같은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 개혁정치(?)를 펼치게 되는데, 권영은 사림원의 시강학사가 되어 충선왕을 돕게 됩니다. 사림원에는 권영 말고도 이진(이제현의 부친), 이승휴, 박전지 등이 근무하며 충선왕을 도왔는데, 충선왕은 이들을 각별히 총애하며 밤늦게 어울려 술을 마시며 정치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충선왕의 천하는 7개월여만에 끝나버리고 다시 충렬왕이 복위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대 숙청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이승휴, 박전지 등은 벼슬자리에서 짤렸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 권영은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좌부승지로써 관리 선발과 임명을 주관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안동 권씨 집안이 충렬왕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커진게 아닌가 하는 상상도 잠시 해 보았는데 그건 너무 지나친 것 같고, -_- 하여간 충선왕이 퇴위한 뒤에도 권영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충렬왕이 밀려나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충선왕이 재즉위하자 권영은 다시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 무렵에 이름을 권'영'에서 권'부'로 바꿉니다.) 충숙왕 때에는 최고 재상직이라고 할 수 있는 영도첨의사사사(신돈이 받았던 그 벼슬입니다.)까지 승진했습니다. 권부의 아들 6명과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으로 책봉되기까지 했구요. 이것이 바로 안동 권씨의 2가지 자랑거리 중 하나인 '1가 9봉군'인데, 이 '1가 9봉군'은 바로 충선왕의 각별한 배려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권부라는 사람의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재상이 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지요. 주자의 [사서집주]를 고려에서 출간하게 한 사람이 바로 권부였거든요. 그래서 [고려사]에서는 東方性理之學自溥(동방의 성리학은 (권)부에게서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향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아 성리학을 발전시킨 사람이 백이정, 이제현인데, 백이정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권부의 부친 권단의 문생이었고, 이제현은 권부의 사위입니다. 안향도 유경의 문생이라는 점에서는 안동 권씨 집안과 간접적인 연관이 있구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한반도에 최초로 들어온 성리학은 안동 권씨 집안의 가학(家學) 비슷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라는 조심스런 추측도 해 봅니다. -o-;;;;
앞서 말씀드린대로 안동 권씨 추밀공파의 입지 급상승은 권수평의 손자이자 권위의 아들인 권단 대에 이르러 이루어집니다. 권단 본인은 별로 벼슬 욕심도 없었고, 40여년간 채식을 고집할 정도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고 합니다. (말년에 실제로 출가하여 승려가 됩니다.) 이런 권단이 벼슬길에 오르게 된 이유는 아버지 권위가 로비와 재산공세 -_- 를 통해 억지로 벼슬자리에 앉혔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_-;;;;
하여간 고려 조정 내에서 권단은 곧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권단이 인정받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역시 유능하기 때문이었지요. [고려사] <열전>에서는 권단에 대해 廉勤精明(청렴, 근면, 상세, 명확)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또한 권단은 부패관리의 두개골을 부숴서 죽일 정도의 (덜덜덜) 단호함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o-;;;; 다른 한 가지의 이유는 권단이 당시 고려 조정의 실력자였던 유경의 후원을 입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경은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여 최씨 무신정권을 끝장낸 바 있으며, '삼한거부'라 불릴 정도의 재산가였을 뿐만 아니라, 발도 넓고 과거시험관도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인맥이 무척 거대했습니다. 한반도 성리학 태동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안향도 유경의 문생이었지요. 유경은 권단을 후원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권단의 아들인 권영을 손자사위로 맞아들여 이런저런 배려를 베풀어줍니다. (그래서 뒷소리도 좀 들었습니다. -_-) 권단 본인도 과거시험관을 거치며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 백이정 같은 사람들을 문생으로 두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생들을 좀 눈여겨볼 필요가 있네요. 이들은 나중에 충렬왕-충선왕 간의 부자간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 대부분 충선왕 편에 서거든요. 충선왕-충숙왕 간의 부자간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에도 대부분 충선왕 편에 서구요. 다시 말해 권단을 중심으로 하여 충선왕을 지지하는 인재 풀(?)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권단의 아들 권영은 나중에 이름을 권'부'라고 바꿉니다. 권부 역시 한반도의 성리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지요. 그 이야기는 3편에서 계속.
제가 그나마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고려 후기에 대한 연재 포스팅을 하도록 하지요. 주로 이야기할 소재는 안동 권씨(중에서도 추밀공파)입니다.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은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에 첫 등장을 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맞싸울 때에 왕건을 도와서 그 공으로 권씨 성을 받았다고 하구요. (원래는 김씨라고 함) 안동 권씨 전승에 의하면 권행은 원래 신라의 왕족 출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조 권행과 추밀공파의 파조 권수평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지는 약간의 의문이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권수평>을 보니 안동사람인데 내력이 희미해 족보는 알 수 없다고 하네요. [고려사] 편찬작업에는 권수평의 직계 후손인 권제가 참여한 바 있고, 또 안동 권씨 추밀공파 집안의 사위인 이제현의 [사략]이 인용됩니다. 따라서 권수평이 정말로 권행의 후손이라면 [고려사] <열전> <권수평>에 내력이 희미해 족보를 알 수 없다는 대목이 들어가진 않았을 것 같은데, 하여튼간에 현재 안동 권씨 족보에서는 권수평을 권행의 9대손이라 하고 있습니다. -_-a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검색어 <권수평>을 입력하면 고려시대 문신이라고 나옵니다. 올바른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권수평은 무관직인 대정(종 9품)을 지냈고, 국왕의 호위대격인 견룡에서도 복무하거든요. 문신의 이력이라고 보기는 힘든데, 나중에 꽤 고위직인 추밀원부사(정 3품)까지 승진합니다. 그래서 문신이라고 한 모양이네요. 하급 무관으로 출발한 권수평이 추밀원부사까지 승진한 이유는 당시가 최씨 무신정권기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권수평의 사망년도가 1250년(고려 고종 37년)인데, 편의상 1200년생이라 치면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던 무렵에 태어나 최충헌의 손자 최항이 집권할 무렵까지 생존한 셈이지요. 권수평이 죽을 무렵에는 온 고려가 몽골 침략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을테구요. 당시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을 때인데, 아마 권수평의 사망지도 강화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권수평의 아들 권위는 한림학사 벼슬을 지냈다고 하고, (진짜로 문신인 모양) 권위의 아들 권단 대에 이르러 고려 조정 안에서 이 집안의 입지는 급상승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모 지인께서 "현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사극을 쓰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하신 바 있다. 상당히 일리있다고 생각했으나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았다.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일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거란에 이기고도 거란에 사대했던 고려 현종의 태도가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지금의 대한민국에게 얼마나 유용하겠는가?
그런데 과거의 일을 참고하여 현실에 적용할 교훈을 얻는 차원이 아니라,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현실을 베껴먹는 최근의 사극을 보면 짜증을 넘어 분노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KBS의 <대조영>이 끝난 뒤 드러난 <대왕 세종>의 예고편에서 받은 충격과 짜증을 아직 생생히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리라. 명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에 고려부흥운동가(?)가 불 붙은 소달구지를 몰고 돌진하는 모습. 나는 정말이지 <대왕 세종>이 꼭 한류 바람을 타고 중동에 수출되었으면 한다. 알 카에다가 "우하하하, 코리아 히스토리 드라마 만드는 애들이 우리 전술(자살폭탄테러)을 베껴먹고 있네? 그렇게 상상력이 딸리나?" 하고 비웃어주었으면 해서다. 윤선주나 KBS 사극 제작진들은 그런 식으로 국제적인 망신을 한번 당해야 제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선덕여왕>을 보면서 짜증이 났다. 개인적으로 김영현이 윤선주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선덕여왕>의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막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미실의 난'에서, 미실=전두환, 위국부=국보위, 상주정 병력=김포의 제 1 공수여단이라는 등식들을 떠올린 사람은 나 하나 뿐인가? 김영현은 신라시대를 다루는 사극을 쓰려는 것인가, <제 5공화국>의 신라 버전 리메이크판을 쓰려는 것인가? 그나마 큰 줄거리를 베껴먹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또 모르겠다. 김영현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덕여왕>의 세세한 부분에서 대한민국의 운동권(?)적인 특징들을 그로테스크하게 심어놓곤 하는데, 이를테면 41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춘추(유승호 분)가 보량(박은빈 분)과의 혼인을 선언하자 덕만(이요원 분)이 '설원랑과 용춘공의 연대.....?' 라고 속으로 뇌까리는 부분을 보라. 나는 그 대목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10년 전쯤에 운동권 학생들과 시민단체들 사이에서 신나게 쓰이던 단어가 (물론 요즘도 쓰이고 있지만) 1300여년 전 신라 공주의 입에서 나오다니. 김영현은 시청자들 귀에 그런 대사가 얼마나 황당하게 들리는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오히려 그런 대사를 통해 시청자들도 이해하기 힘든 고도의 전위법(Dépaysement)을 구사하려는 건가? 출처가 정확하진 않지만, 어디선가 김영현이 신라 관련 논문 100편을 읽고 <선덕여왕>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공부를 많이 하면 뭐하나. 관점이나 접근방법 자체에 결함이 있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이를테면 <천추태후>처럼) 특히 현실에 대한 지식을 빈곤한 상상력의 땜빵으로나 이용해 먹으려든다면 그 모든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극 작가들에게 부탁하노니, 사실과 논리를 임의대로 취사선택하는 태도를 벗어주시기 바란다. 그런 태도야말로 작가의 편의주의적 발상 아닌가. P. S. 1. <선덕여왕> 39회 마지막 부분을 보니 덕만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은 촌주를 직접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백성이 정부를 믿지 못한다면 먼저 믿음을 주면서 달랠 일이지, (그런 면에서 덕만은 상앙보다도 훨씬 급이 낮다.) 그런 식으로 함부로 사람을 죽여? 그런데 일부 노빠들은 그 장면 보면서 좋아라 하더라. 은연중에 덕만=노무현, 말 안듣는 백성=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란 등식을 세워놓은 모양. -_-;;;; P. S. 2. 최근에 신주진씨라는 분이 [29인의 드라마작가를 말한다](밈, 2009)이란 책을 내신 모양이다. 김영현과 윤선주에 대한 글도 있길래 들여다보니 <선덕여왕>의 덕만에 대해서는 근대의 계몽적 캐릭터에서 벗어난 탈계몽적 캐릭터라고 하질 않나, (그런 캐릭터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함부로 백성을 죽여?) 객관적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냐며 윤선주를 옹호하질 않나. 한마디로 "즐!!!" 이었다. 개인적으로 비추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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